일상생활에서의 개념을 삶 이후, 삶 전체에 적용시키는 오류
평소에 우리는 어떠한 행위의 의미를 그 목적에다 연결시킨다. ‘대학에 가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
우리는 삶을 일정한 계획 하에 살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이 유용하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끝은?
왜 대학에 가야 하는데? 성공하기 위해서? 왜 성공해야하는데?
권력을 잡기 위해서? 혹은 부와 명예를 위해서? 그래서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이러한 생각의 끝은 곧 더 이상 이유를 댈 수 없는 감정적인 것으로 귀결된다. 예를 들어 결국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데?
인간이 행복하다는 것이 우주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가?
혹은 결국 ‘신의 뜻에 따라’..
신은 왜 존재를 하는데?
이러한 질문 앞에서는 보통
그냥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러한 것이, 위대한 진리가 있을 거라고
억지로 끝마무리를 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생각에 우리는 당혹스러워진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이는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목적을 생각하는 습관(?)은 일상생활 혹은 삶 내부에서의 그 유용성 때문에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니까. 애초에 삶 내부에서 벗어나 삶 자체를 생각할 때는 목적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즉, 하나의 논리 오류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삶이 왜 목적이 있어야하는가?
목적이 없다는 생각 자체에 우리는 익숙하지 않다.
살아가는 ‘감정적인’ 이유
‘너를 만나고 내 삶의 이유를 알게 되었어.’
‘죽을 때까지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돕고 싶습니다. 그들을 돕는 게 제 삶의 이유입니다.’
이로 인한 감정적인 사명감이 삶을 유지하게 해준다. 삶을 포기하고 자살을 생각하려 할 때, ‘내가 아니면 그들은 누가 돕나’하는 생각이 발목을 붙잡는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느끼는 ‘내 삶의 이유’는 사실 어떻게 보면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좋은 방향으로 유도를 하는 속임수라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실은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고통을 줄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들 신경에서 단지 ‘고통’이라는 전기신호가 사라지게 할 뿐인데.
그들이 죽지 않는다고 어떠한 의미가 생기나?
그들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데?
내가 하는 행동의 의미(혹은 우리가 목적이라고 자주 혼동하는?)를 이런 식으로 쭉 연쇄적으로 따라가다 보면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우리의 삶을 기댈 그러한 목적, 명분은 없다.
최종적인 단 하나의 목적, 명분, 진리를 상상할 수 없다. 그 최종적인 진리의 이유는 또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단지 내 삶을 유지시키는 것은 이성적으로 의미, 목적, 명분을 아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강한 생존 본능, 거짓으로 스스로를 설득한 pseudo 삶의 의미(사명, 아프리카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꼭 목적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목적이란 것은 아주 실생활적이고 사소한 것에만 부합하는 개념이다.
삶 자체에 목적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 동안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민하였지만,
삶의 의미가 없으면 어떡하나 고민하였지만,
삶의 의미를 굳이 찾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그저 유전자에 프로그래밍대로, 감정이라는 강력한 통치 도구에 의존하여
그냥 살아가면 그것으로 끝인 듯싶고, 그게 맞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자들은 이를 두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 한 것인가?
그 동안 왜 이리 삶의 의미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삶의 의미가 설마 없는 건 아니겠지 하고 불안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삶의 의미가 없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 또한 하나의 감정적인 현상이었던 것 같다.
일상생활에서는 모든 행위의 의미와 목적을 생각하는 게 좋은 영향을 나타내기 때문에 진화적으로 유전자에 프로그래밍 되어,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에는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그러한 감정 현상.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일을 하며 살고(사명감. pseudo 의미. 지금까지 의논한 것을 ‘감정으로는 비록 잘 몰라도 이성으로 이해하는 의미’라면 지금 얘기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최종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감정적으로는 이해가 되는 의미’)
항상 행복하게 즐겁게 사는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행복의 기술을 잘 연구하고 연마하여야 한다.
(이것이 쉽지 않은 부분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행복이란 단기간의 쾌락이라기보다는 고차원적이고 복합적인 의미의 만족도이다.
나는 연민이란 감정과 본능에 의지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제해 주는 것이 가장 가치(비록 결국은 pseudo라 해도)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의사라는 직업을 택했으며, 지금은 구체적으로 국제기구에서 의사로서 활동하는 진로를 탐색하고 있다. 이 일에 몰입하며 FLOW를 느끼고 자아존중감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

